'favorites/movie'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0.01.16 업(up)/마더/번애프터리딩 2
  2. 2009.08.01 노잉 2
  3. 2009.07.01 로나의 침묵
  4. 2009.06.03 잘 알지도 못하면서
  5. 2009.05.15 박쥐
  6. 2008.08.01 심플맨
  7. 2008.05.08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8. 2008.05.08 씨 인사이드
오래간만에 영화 세편을 연달아 감상.

업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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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우화로 표현했다. 혹은 그것에 대한 아동용 교재. 예전에 환상적으로 보였던 모험정신-제국주의의 실체와 마주하는 것. 그 환상 때문에 짊어지고 끌고 다녀야 했던 과거의 유산(집)을 마침내 내려놓게 되는 것. 타자(동양인)와 유사가족을 이루게 되는 것. 이건 너무 뻔하잖아!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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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난폭한 이야기다. 여러가지로 읽힐 수 있는 난폭한 이야기를 시침 딱 떼고 봉준호 스타일로 표현하기. 그 봉준호 특유의 젊잖음이 영화를 지루하고 지루하게 만든다. 트윈픽스의 2009년 한국 봉준호 버전. 딱 그런 느낌.
 이 영화는 유난스러운 한국의 모성에 대한 냉정한 시선이며 그 모성의 이면에 음습하게 자리잡고 있는 욕망에 대한 은유다. 그 유난스러움의 이면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 유난스러움의 수혜자는 또 어떻게 타락하는가. 넌 엄마가 없구나 하면서 우는 김혜자의 모습이 정말 슬퍼보였다.

 확실히 현재 한국 상업영화에서 박찬욱과 봉준호는 두 명의 거장이다. 이 두 거장들은 서로 등을 대고 서로 거울처럼 마주본다. 현실적으로 난폭한 주제를 젊잖게 이야기 하거나, 종교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야기를 폭력적으로 보여주기. 마침 2009년에 두 거장들은 모성이라는 소재를 건들고 지나간다. 지금 한국의 타락은 모성의 모습으로 치환된 욕망에게 책임이 있다.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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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위기가 마침내 진짜 삶의 위기로 나타나는 과정. 아무것도 아닌 멍청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마침내 파국을 맞이한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평범한 일상은 정말로 멍청해 보인다. 그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기호들 그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파국에 대해서 실컷 비웃고 나니 내가 갖고 있는 환상과 기호들에 대해 돌아보고 한숨짓게 된다. 잔인한 시선에 동조해서 낄낄 거리고 이내 우울해지는 진짜배기 블랙코메디.
 여담이지만 브래드 피트는 멍청한 화이트 트래쉬를 연기할 때 정말 대단해 보인다. 정말 그 사람 같다.


Posted by 버그맨

2009. 8. 1. 03:47 favorites/movie

노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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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시간짜리 라엘리언 묵시록에 대해서 좋은 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적을 것 같다. 50년대 고전 SF물인 '세계가 충돌할때' (when worlds collide. 1951)의 라엘리언 버전인 이 영화에서 기독교의 유구한 전통이 그러했듯 이 유사 기독교인들도 이 공포로 사람들을 승복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특수 효과가 놀라움과 공포를 부추기는데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호러영화의 장르적 특성들을 끌어다가 사용하고 있다. 태양의 이상활동을 이미 예측하고 있는 천체물리학자의 활극과 별다르게 천체물리학자일 필요도 없는 사람이 가장인 불안정한 가정을 둘러싼 침입자들과 불길한 예언의 공포. 당신이라면 어떤 영화를 선택할 것인가.
  굉장히 매력적일 수 있는 주제를 아주 작은 범위의 관객들만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낸 저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는 힘들테지만-헐리웃의 제작자들은 가끔 아주 이상한 영화들을 당연하다는 듯 만들기 때문에-누군가가 믿는 종교를 위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를 단지 이용한 것이라는 혐의를 완전히 지우기는 힘들 것 같다.
Posted by 버그맨

2009. 7. 1. 11:15 favorites/movie

로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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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라고 불리는 감정의 윤리.

 안타까움, 연민 혹은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그런 감정이란 윤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대등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어떤 종류의 나약함이나 사회적 계급의 확정과 같은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중요성을 잊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계급관계가 도치된 상황에서 혹은 모호해진 상황에서 연민이란 감정의 윤리적인 위치를 되새겨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타락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사실 탐욕이 연민에 앞서기 때문은 아닌가.

Posted by 버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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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어째 점점 그의 영화와 비슷해지고 있는 듯 하다. 같은 이야기가 변주되면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 누군가와 섹스하고 싶다는 욕구, 그 욕구가 해소되거나 말거나 결국 느끼게 되는 찝찝함이라는 이야기를 인물만 바꾸어 가며 반복되고 있다. 마치 그의 영화 안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약간의 변주를 거쳐 반복되는 것 처럼. 내러티브에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런 홍상수의 영화에 짜증을 내고 남자가 여자랑 섹스하고 싶어서 찌질거리는 영화에 뭘 그렇게 높은 평가를 내리냐며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흠 과연 그런걸까. 자기가 못 보는 것은 거기에 없다라고 믿는 것은 뭐 인간의 고유한 약점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그의 영화가 반복하고 있는 소재의 변주를 알지 못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는 관객이 느끼는 찌질함에 대한 스트레스라면 모를까 이 감독의 영화를 몇 편이나 보고서도 같은 얘기를 그의 영화안에서 반복하며 주제를 이끌어 내는 스타일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면 좀 불쌍하달까. 무식하거나 센스없음이 자랑은 아닐터인데.

 이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역시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가 약간의 변형을 갖고 반복된다.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있고, 결국 그 여자와 하는 남자가 있고, 못해서 신경질을 부리는 남자가 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도 하고 반대편에 서있던 그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뭐라고 하냐하면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만 안다고 해. 이건 마치 관객에게 당신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과연 당신이 이 영화에서 본 것이 정말 본것입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맥락을 통해서 영화적인 관습을 통해서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그런것일까라고 되묻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과 보여주지 않는 장면, 짐작하게 만드는 장면과 구조들은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엄지원은 일부러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것일까, 왜 공연히 김태우에게 신경질을 냈던 걸까, (개인적으로 생활의 발견에서 음흉하게 굴던 예지원의 캐릭터가 떠올랐다) 잘 나가는 후배 감독은 정말 음흉하게 따먹을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김태우와 정유미 사이에선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고현정과 하정우의 관계는 어떤 것이길래 그렇게 분하게 울음을 터뜨렸는지, 낫을 들고 같이 쳐들어온 나머지 두 명은 또 고현정과 무슨 관계인지. 영화를 벗어나 현실에서의 인식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내가 아는 것은 정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짐작해 버리는 그런 것일까.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 감독이고, 마치 홍상수 자신의 이야기를 대변 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도 안되는 예산으로 배우들에게 개런티도 못주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혼자 지레 짐작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왜 당신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만드는가 라고 아무하고나 자고 키스를 안해본 교수가 없는 여자애가 묻기도 하고 무척이나 무신경해 보이는 남자애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열을 올리며 대답해 보지만 공허해 보일 뿐이다. 이런데서 열내면서 얘기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라면서 허탈하게 어쩌면 초월한듯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쪽에서 상업적으로도 뛰어난 성공을 거둔 스타 감독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말 그대로 대로 피를 토하는 악취미 적인 영화를 만드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배우들에게 개런티도 줄 수 없을 정도의 제작비로 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피를 토하듯 허탈하게 스스로의 얘기를 섞어서 인식론에 대한 선문답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 제작비 떄문인지 그림이나 사운드의 어설픔이 적잖이 느껴진다. 핵심이 아닌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간다라는 특공대 같은 처절함이 느껴진다. 지난 영화인 밤과 낮은 DVD제작조차 안되고 있는 실정이고. 이런 영화들을 동시대에 리얼타임으로 보면서 살고 있다는 점이 너무 행복하지만 이 도사 같은 천재감독의 후속작이 가능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한심하다.



Posted by 버그맨

2009. 5. 15. 04:06 favorites/movie

박쥐

스포일러 만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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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녀의 사랑을 득하지 못한 신부는 명분있는 우아한 자살을 감행하지만 부활하여 영생과 죄의 본성을 얻게 된다.
 수녀의 고해성사에 신부는 죽은 놈은 잊으라고 한다. 그러자 수녀는 남자건 뭐건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부님은 기도나 해주시라고 쏘아 붙인다. 신부는 누군가를 살리지 못해서 죽으러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 환자는 나중에 신부에게 피를 공급하는 음식으로 전락한다. 어짜피 갈구하던 욕망에 대한 죄의식으로 죽으러 들어간 것 뿐이다. 자살과 순교는 비슷한 것이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죽어가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 연주하던 리코더로 피를 토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죽어가는 자신에 대한 연민. 쏟아지는 피.

2. 부활한 신부는 창녀와 사랑에 빠진다.
 마작판에서 송영창과 은근한 눈길을 주고 받는 김옥빈을 보자. 순진한 여자가 뱀파이어와 눈이 맞은 것은 아닌것이다. 이 여자, 원초적인 힘에 강렬히 끌리는 타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송영창은 실은 미성년자 성매매로 처벌을 받고 아직까지도 연기 활동에 족쇄가 차여진 연기자다. 사회적 힘으로 사회적 약자의 성을 착취한 배우라는 이미지는 영화에 오버랩된다. 니가 감독이라면 왜 송영창을 캐스팅 했겠니? 김옥빈도 처음 부터 욕망을 어쩌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인물이었던 것.
 신부는 자살자의 피로 연명한다. 종교적 구원과 죄를 교환하는 신부. 타인에게 종교적 안식감을 주는 것이 죄악이 된다. 욕망에 몸부림치는 선배 신부도 살해하고 그 피를 마신다.

3. 신부는 창녀를 얻기 위해서 친구를 죽인다.
 고통에 빠진 그녀를 구원하리라는 명목하에. 하지만 거짓말 이었어요. 이들은 죄의식에 시달리는데 그래봤자 코메디. 종교적인 죄의식이 아닌 원초적인 죄의식도 어짜피 이들에게는 코메디 일 뿐. 왜 신하균은 어색하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캐릭터가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4. 시어머니는 쓰러지고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무섭다.
 나는 이 영화에서 풍을 맞은 김해숙의 시선이 제일 무서웠다. 송강호와 싸움을 벌이는 김옥빈을 쳐다보는 위치에서 포커스 아웃 되어있는 그래서 이 쪽을 보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쪽에선 확인할 수 없는 시선. 마더는 죄악을 바라보고 분노할 뿐 무력할 뿐이네.

5. 신부는 창녀를 죽이고 부활시킨다.
 이 신부의 욕망이란 얼마나 찌질한가. 그만큼의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도 결국 이 여자에게 집착한다. 능력에도 불구하고. 처음 금지되었던 것에만 집중하는 집중력. 별 대단한 것도 아닌 개인적인 욕망이 죄악으로 치환되고 파멸로 이끄는 단초가 된다.

6. 일이 커지자 결국 자살을 택한다.
 태양에 불태워 지는 일종의 번제. 죽음과 피의 바다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처음 사랑의 모티브가 되었던 구두만을 남기고.


 커다란 어머니와 욕망으로 부터 거세된 아들과 창녀의 모티브. 예쁘게 차려입고 아무도 찾지 않는 상점에서 옷을 파는 두 여자의 이미지와 카톨릭이 오버렵된다. 죄악과 고통의 근윈일 뿐인 종교와 욕망. 욕망과 종교적인 타부가 모두를 괴롭게 한다.

 사랑이라는 죄 밖에 없었던 신부가 종교 때문에 악의 근원이 되고 그 종교의 최고좌에 앉아 있는 상징들을 차례로 해치운 다음에 스스로를 지옥앞에서 번제로 바친다. 이게 치정 살인극이라고? 농담도 참.

 좀더 표현주의 적으로 환상적이고 우아하게 만들어 졌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박찬욱 감독 영화 중에서 제일 좋았다. 보고 나서 대단하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겐 한국영화 중에선 홍상수 감독 영화이래로 처음이다. 잘 만들었네 혹은 재미있네가 아니다. 와 이건 정말 대단하다! 라는 느낌인거다.
 게다가 김옥빈. 이 여배우는 10년전 부터 기획되었다는 이 영화를 위해서 한국 영화사에 예비되어진 배우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존재감 없고 그냥 그런 여배우 였던 김옥빈은 이 영화 하나로 최고가 되었다는 느낌마저 있다. 김옥빈이 아니라면 이 역할을 누가 해낼 수 있었을까. 누가 섹시하면서도 사악해 보이는 저런 얼굴을 갖고 있을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중요한 축은 하필 마더이다. 봉준호의 신작도 마더. 이 사회는 마침 비뚤어진 모성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은 시점에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봉준호의 신작도 기대가 된다.


Posted by 버그맨

2008. 8. 1. 01:46 favorites/movie

심플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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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한 이야기와 장면들이지만 찍은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영화들이 있다. 이를테면 갑돌이와 갑순이가 대화를 하는 아주 간단하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장면. 상투적으로 어깨너머로 보이는 상대방의 얼굴. 이 간단한 순간이 늘 그러던 방식을 버리고 미쟝센과 몽타쥬를 고민한 흔적이 보이면 난 일단 그 영화를 진지하게 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단정하게 앉아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장면. 대사가 끝나고 바로 자르지 않고 어색함을 남기는 편집같은 것. 영화는 소설이나 연극이 아니고 아무튼 카메라로 얘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영화라는 예술의 진면목을 살짝 들여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할 하틀리는 명성만 알고 있었던 미지의 감독으로 씨네마테크에서 하는 특별전으로 아주 운좋게 접할 수 있었는데 과연 명불허전. 부감으로 잡은 여주인공의 어깨로 들어오는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이었다. 프레임안에서 인물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이어붙일까하는 고민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장면이 여기저기 있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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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예산으로 찍었는데 꽤 반응이 좋다더라서 가보니 죄다 테레비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과 편집과 연기만 그득그득하던 누구누구의 영화랑은 달라서 너무 좋았달까. 아무튼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테레비랑은 절연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이 심플맨이란 영화 그 동안 보고 싶은데 보지 못했던 사람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다. 3시 20분에 도착해서 무려 (소박한 줄이었지만) 줄을 서서 표를 샀다. 그 공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고.











































 

Posted by 버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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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형제의 신작을 보고 왔습니다.
파고랑 비교되는듯 한데, 제 생각엔 훨씬 잔인하고 훨씬 염세적입니다.
자기가 자초하기도 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찾아오기도 하는
그리고 일단 찍히면 말려들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악랄함때문에 한숨이 다 나오더군요.

요새 막나가는 영화들 처럼 힌트란 힌트는 죄다 숨겨 놓고 반전입네하는 부분은 없고
보여줄 건 다 보여주면서도 긴장감이 강렬하네요.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때문에 극장에서 보시길 추천합니다.

ps. 포스터의 헤드카피는 '모든 행운에는 피의 댓가가 뒤따른다' 지만 글쎄요.
     정작 영화에선 악랄함은 인생 도처에 지뢰밭처럼 깔려있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2008.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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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듬새가 뛰어난 영화를 보면 좀 주늑들때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랬다.
- 아마 감독은 모스가 살해당하는 장면보다, 뒤늦게 보안관이 도착하는 장면이 더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은 계속되는 그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

Posted by 버그맨

2008. 5. 8. 02:23 favorites/movie

씨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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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서 안락사의 문제는 상당히 첨예한 문제인 것 같다. 자살을 개인의 결단으로 보고 아름답게 혹은 숭고하게 이미지를 만들어 낸 일본이나, 왠지 개인의 원한, 억울한 혼령 같은것이 쉽게 떠오르고 마는 우리나라에 비해서 서양 사람들이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은 죄악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런 첨예한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서구의 시각으로는 그런 접근에 꽤 성공했는지 (서양의)평단으로 부터는 제법 지지를 받고 있는 듯 하다. 정치적, 종교적 시각에 대해서는 주인공과의 논쟁이라는 방식으로 양쪽의 시각을 나누어 주었고, 주인공의 처절함에 집중해서 동정하게 만드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안락사를 지지하는 편에 서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지도 않았다. 주인공은 겉으로 (영화에서) 보기에는 제법 잘 지내는 것 처럼 보이고, 그가 생각하는 존엄성이란 순전히 개인이 생각하는 존엄성의 문제로 그려지는 듯 하다. (내가 스스로 존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존엄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적어도 영화속에선 제법 잘 지내고 있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몸의 일부를 사용할 수 없음에도 생존을 위해 구걸이든 노동이든 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첨예한 문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중립적인 시각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구지 뭔가를 표현해야할 이유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첨예한 문제에 있어서 판단을 유보하고 가운데 서서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맞긴다는 태도가 일으키는 잠시의 잔잔한 논의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교회를 무너뜨리고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것 같은 격렬한 행위는 그 자체로 강한 의사표현이다. 어떤 창작자가 의사표현을 중지하고 단지 가운데 서서 지켜보려고 할때, 그래서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이 단지 안심하고 그냥 다양한 의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군 하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때, 그 사안이 첨예하기 때문에, 그 작품은 중립적이라는 사실 자체로 반동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의 절박함 혹은 처절함에 대해서 중립적이라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라는 의문때문에 이 영화의 여러가지 미덕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지지를 보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2007.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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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시거역으로 끔찍한 연기를 보여준 하비에르 바뎀이 주인공. 으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이다. 둘다 지독한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긴하지만.

Posted by 버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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