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3. 23:08 favorites/movie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어째 점점 그의 영화와 비슷해지고 있는 듯 하다. 같은 이야기가 변주되면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 누군가와 섹스하고 싶다는 욕구, 그 욕구가 해소되거나 말거나 결국 느끼게 되는 찝찝함이라는 이야기를 인물만 바꾸어 가며 반복되고 있다. 마치 그의 영화 안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약간의 변주를 거쳐 반복되는 것 처럼. 내러티브에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런 홍상수의 영화에 짜증을 내고 남자가 여자랑 섹스하고 싶어서 찌질거리는 영화에 뭘 그렇게 높은 평가를 내리냐며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흠 과연 그런걸까. 자기가 못 보는 것은 거기에 없다라고 믿는 것은 뭐 인간의 고유한 약점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그의 영화가 반복하고 있는 소재의 변주를 알지 못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는 관객이 느끼는 찌질함에 대한 스트레스라면 모를까 이 감독의 영화를 몇 편이나 보고서도 같은 얘기를 그의 영화안에서 반복하며 주제를 이끌어 내는 스타일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면 좀 불쌍하달까. 무식하거나 센스없음이 자랑은 아닐터인데.
이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역시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가 약간의 변형을 갖고 반복된다.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있고, 결국 그 여자와 하는 남자가 있고, 못해서 신경질을 부리는 남자가 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도 하고 반대편에 서있던 그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뭐라고 하냐하면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만 안다고 해. 이건 마치 관객에게 당신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과연 당신이 이 영화에서 본 것이 정말 본것입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맥락을 통해서 영화적인 관습을 통해서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그런것일까라고 되묻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과 보여주지 않는 장면, 짐작하게 만드는 장면과 구조들은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엄지원은 일부러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것일까, 왜 공연히 김태우에게 신경질을 냈던 걸까, (개인적으로 생활의 발견에서 음흉하게 굴던 예지원의 캐릭터가 떠올랐다) 잘 나가는 후배 감독은 정말 음흉하게 따먹을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김태우와 정유미 사이에선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고현정과 하정우의 관계는 어떤 것이길래 그렇게 분하게 울음을 터뜨렸는지, 낫을 들고 같이 쳐들어온 나머지 두 명은 또 고현정과 무슨 관계인지. 영화를 벗어나 현실에서의 인식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내가 아는 것은 정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짐작해 버리는 그런 것일까.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 감독이고, 마치 홍상수 자신의 이야기를 대변 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도 안되는 예산으로 배우들에게 개런티도 못주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혼자 지레 짐작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왜 당신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만드는가 라고 아무하고나 자고 키스를 안해본 교수가 없는 여자애가 묻기도 하고 무척이나 무신경해 보이는 남자애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열을 올리며 대답해 보지만 공허해 보일 뿐이다. 이런데서 열내면서 얘기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라면서 허탈하게 어쩌면 초월한듯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쪽에서 상업적으로도 뛰어난 성공을 거둔 스타 감독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말 그대로 대로 피를 토하는 악취미 적인 영화를 만드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배우들에게 개런티도 줄 수 없을 정도의 제작비로 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피를 토하듯 허탈하게 스스로의 얘기를 섞어서 인식론에 대한 선문답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 제작비 떄문인지 그림이나 사운드의 어설픔이 적잖이 느껴진다. 핵심이 아닌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간다라는 특공대 같은 처절함이 느껴진다. 지난 영화인 밤과 낮은 DVD제작조차 안되고 있는 실정이고. 이런 영화들을 동시대에 리얼타임으로 보면서 살고 있다는 점이 너무 행복하지만 이 도사 같은 천재감독의 후속작이 가능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