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앞 회에서 린치극으로 상황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이것은 위험하다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사건이 있을때 사건의 가해자를 악의 화신으로 상정하고 사적인 린치를 해결방안으로 삼고 싶어하는 욕망은 이미 너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또 그것이 매우 편리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해결 방법이겠지만, 그 방법이 갖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 (KKK단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편협한 믿음과 결합되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써 폭력에 대한 믿음, 문제를 단순화 시켜서 내재된 모순(경우에 따라서 매우 불쾌할 수도 있는)에 눈이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단 점.

 말하자면 요즘 가끔 나타나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강풀작가는 너무 나이브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중의 기호에 (그것이 아주 위험할 수 있음에도) 너무 영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지막회를 보면 결국 또 다른 살인의 주인공인 경비아저씨는 또 다른 죄책감과 마주치게 된다. 이것은 해결방식으로써의 또 다른 살인에 대한 작가의 경고일 수도 있고,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복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직접적으로 마지막 한 방을 가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클린업. 왠지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종교적 메타포. 기독교적 세계관. 죄를 누군가가 짊어지고 그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죄악(죄책감)에서 일정부분 해방을 얻게 된다는 결론. 
 
 사적인 폭력은 여전히 주요한 해결방안으로 남았고, 한 명의 살인자는 악마가 또 한명의 살인자는 일종의 희생양이 되었다. 자살폭탄테러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떻게 풀어내는 것이 옳았을까.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갖는 것이 옳을까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 혹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컬럼바인 혹은 강풀의 이웃사람.

 강풀의 이번 작품에서 나는 시스템에 대한 무력감과 불신을 읽게된다. 한 때 운동권이었던 변절자들이 만든 회고적인 정치상황에 대한 무력감. 그 불신의 정체는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와 내 사람의 안녕을 돕지 못할 때 유일한 해결책은 내 손으로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 마당이니 그가 구세주가 되지 않을 방도가 있겠나 뭐.
Posted by 버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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